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 왕건/비판 (문단 편집) == [[캐릭터 붕괴]] == [[태조 왕건]] 등장인물들 캐릭터 진행 설정에 일관성이 없이 특정 면모가 갑자기 튀어나와 강조되거나 극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전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면… * [[김총(태조 왕건)|김총]]: 극 초반부에 [[견훤(태조 왕건)|견훤]]이 수달을 의형제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의형제들을 주욱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총은 의형제들 중 막내로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면 이후 견훤이 김총을 의형제로 대하거나 김총 스스로 수달이나 추허조 등이 차례로 죽어나갔을 때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일절 안 나온 것.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취급이 딱 '꾸준히 보이기는 하는데 특별한 점은 없는 [[후백제]] 장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2차 조물성 전투가 다루어진 147회에서 정점을 찍는데 여기선 김총이 [[신덕(태조 왕건)|신덕]]의 '부장'으로 나온다.[* 병사들이 피곤하니 장수들끼리 겨루자고 합의가 된 뒤 신덕이 '우리 쪽에서 부장을 내보내겠으니 그쪽도 부장이 나와라!' 라고 외치는데, 그 다음 장면에서 달려나가는 게 김총이다.] 그런데 김총은 극 초반부부터 나오는 [[후백제]] 개국공신인 반면 신덕은 한참 뒤에야 등장하므로, 신덕이 고속 승진이라도 한 것이 아닌 이상 오히려 신덕이 김총의 부장이여야 한다. * [[박술희(태조 왕건)|박술희]]: 극 초반에 왕건과 처음 만났을 때 '소인은 무쇠 철퇴를 애용합지요!' 라고 소개했는데 문제는 이후 철퇴를 쓰는 장면이 거의 없다.[* 굳이 있다면 [[아자개(태조 왕건)|아자개]]가 고려로 가면서 호위할 때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용.] 물론 배우들이 부상 당할 것을 염려할 수 있겠지만, 저 대사 자체를 넣지 않거나 [[편곤|쇠사슬 끝에 철뭉치가 달린 형태]]가 아니라 [[곤봉]]을 들려줬으면 문제가 없었을 부분이었다. 또한 머루주와 관련해서도 오류가 있는데, 이 술은 원래 박술희가 아자개의 생일에 축하 사절로 방문했을 때 아자개가 답례로 준 것이었다. 또한 박술희는 마침 순행 중에 상주 전선을 방문한 궁예에게 머루주를 바치면서, 상주는 머루가 아주 많은 고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이후로는 [[러시아식 유머|아자개가 박술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박술희가 아자개에게 주는 선물로 바뀌었다.]] * [[신숭겸(태조 왕건)|신숭겸]]: 평산에서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리는 일화가 나오는 대목에서 왕건이 '아우가 신궁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라며 감탄하고 신하들도 '능산 장군의 활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사옵니다' 라며 동의한다. 그러나 신숭겸이 활을 쏘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다. 대본 작가가 다르긴 하지만 [[무인시대|약 2년뒤에 방영된 같은 KBS 드라마]]에서 [[두경승(무인시대)|활을 주로 쓰는 캐릭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연으로서 등장한 바 있고, 활 쏘는 장면을 간간이 넣어 명궁임을 충분히 어필한 사례가 있었다.[* 가령 활 연습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든지 이의민의 매를 활로 쏴 맞춰 죽인다든지 활로 자객을 제압한다든지 등등.] 즉, KBS 사극의 연출로 명궁 컨셉은 불가능한 묘사가 아님에도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특징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것. * [[양길(태조 왕건)|양길]]: 작중 [[은부(태조 왕건)|은부]]의 언급에 의하면 중증의 의심병 환자로 그 의심 때문에 수 많은 일을 그르쳤다고 한다. 양길 스스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난세를 살아가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정작 극중 모습은 명주를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궁예와 은부를 지나치게 믿는다. 심지어 복지겸이나 명길 같은 주변 인물들이 궁예를 의심하고 양길을 만류하더라도 양길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궁예를 믿었고 결국 궁예와 은부에게 통수를 맞고 말았다. 또한 이렇듯 어리석고 소견이 좁은 모습으로 한참 묘사되다가 정작 궁예와 무력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분위기가 급반전하여 사위와 장인 간에 전투를 벌인다는 상황을 한탄하거나 여생을 편히 보내라는 궁예의 말에도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등 군웅다운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극과 극의 캐릭터' 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양길 역시 궁예를 1년동안 지켜본다거나 궁예에게 갑자기 회군을 명령하거나 복지겸을 딸려 보내는등 나름대로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은부를 믿은건 한참 전부터 자신의 부하였으니 신뢰해서 그런다고 변명 할수도 있겠으나 한참 특정한 면모를 보여 놓고 서는 별로 설득력 있는 전개 없이 그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은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용검(태조 왕건)|용검]]: 중반 이후에 들어서야 '지금까지는 소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갑툭튀했는데, 갑툭튀한 이후 비중이 컸느냐고 하면 그것도 애매하고 정말로 소개할 기회가 별로 없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 초반부에는 양검은 물론이고 신검의 비중도 그리 크지는 않았으므로 딱히 대사를 줄 것 없이 배경에 세워 놓기만 해도 충분했으며, 이때는 아역이 대신 나왔기 때문에 출연료 걱정도 크다고 하기 어려웠다. * [[은부(태조 왕건)|은부]]: 극 초반에는 [[복지겸(태조 왕건)|복지겸]]과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궁예가 양길에게서 최종적으로 독립해나왔을 때[* 명주성 공략을 앞두고 양길이 궁예를 북원으로 소환한 뒤, 환선길, 이흔암 등을 딸려서 되돌려 보내는 시점이다.] 궁예의 독립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등은 물론, 궁예가 복지겸을 얻을 때에는 '친구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 운운하며 설득했을 정도.그러나 두 인물의 친분이 여기까지라는 설정이라도 있는지 궁예가 철원성을 함락하고 나라를 선포한 이후 은부와 복지겸이 엮이는 부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뒤로 두 사람을 엮을 만한 장면이 전혀 없었다면 그나마 납득이 되지만 그것도 아니다. 복지겸은 오랫동안 병부령으로서 중앙에 머무는 것으로 묘사되며 은부도 내군 장군으로서 궁예의 곁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충분히 여러 번 마주칠 수 있었다. 궁예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가 종간이 고경참문을 위조하는 사건을 일으킬 무렵에 종간과 최응이 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있는데 복지겸과 은부가 이런 식으로 활용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 * [[장화왕후|장화왕후 오씨]]: 극 초반 나주 공략전에서는 단신으로 마진으로 향해 왕건을 만나러 가는가 하면 전투에도 직접 나서는 것으로 그려지고 태평이 남동풍을 불러와 수달이 생포되는 부분에서도 자청하여 왕건과 떨어져 나주에 남아 나주의 태수인 아버지 오다련을 여러모로 돕는 것으로 나온다. 이에 오다련이 '내 딸이지만 장수들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맡아 하고 있다' 라고 불평을 섞어 평할 정도였으며, 나레이션으로도 '당찬 성격이었던 것 같다' 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왕건이 즉위한 이후 후반부 황후로 책봉되고 왕궁에 들어앉은 뒤로는 신명순성왕후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날때마다 남편과 태자인 아들을 걱정하는 유약한 모습만 보인다. * [[최응(태조 왕건)|최응]]: 극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 왕건의 책사로 등장하지만 궁예 시절과 왕건 즉위 당시에는 정치적인 판세를 보는 식견이 뛰어나고 각종 경전에 해박한 모습으로 등장했을 뿐, 전략과 전술에 능하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고 이에 대한 사전 언급도 없었다. 그런데 태평이 [[조물성 전투]]에서 병사할 무렵부터 작전 참모로서의 면모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비슷한 정치가, 책략가 캐릭터인 종간과는 좋은 대비를 이루는데, 그에게는 병법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설정[* 양길 휘하에 들어갔을 때 복지겸이 병법을 공부한 적이 있냐고 묻자, 종간은 육도삼략 등 병서를 공부한 적 있다고 답변한다. 그리고 [[후고구려]] 건국 이전까지 종간은 군사참모 역할을 맡았다.]을 깔아 놓고 전략가의 면모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즉, 거창하게 묘사할 필요 없이 그저 간단한 장면이나 사전 언급 등으로 설정을 깔아놓을 수 있음에도 드라마는 이를 무시한 것이었다. 또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고 정윤 문제가 잠시 나온 이후나 태평이 병사하고 최응이 [[고려]]의 유일한 책사로서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종간마냥 관복을 입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왕건 앞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종간은 적어도 극중의 묘사로는 궁예에게 관직을 받지 않았으니 그나마 변호할 여지가 있으나[* 다만 어거지로라도 변호하자면 그렇고, 왕에게 심한 결례를 저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대학 교수보고 청와대로 오라고 초청했다고 가정해 보자. 국가원수를 만나러 가는데 티셔츠에 청바지 입는 게 맞겠는가, 정장을 입는 게 맞겠는가? 관직이 없어서 관복을 입을 수 없다면, 평복을 입을 것이 아니라 관복은 아니되 그와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는 게 맞다.] 최응은 내봉성령과 병부령이라는 관직을 멀쩡히 제수받고 조정에 있던 상태였으므로 작중내 관복을 입지 않는 것은 처벌받기에 충분한 사유가 되는 일이다. * [[허월(태조 왕건)|허월]]: 궁예가 무리하게 철원 천도를 추진할 때 [[석총(태조 왕건)|석총]]은 허월에게 명주성을 궁예에게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을 했는데 문제는 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 궁예가 진짜 미륵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저 진짜 미륵이 오기 전에 세상을 잠시 맡겼을 뿐이라는 것.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드라마 초반부에 보여준 행동과도 맞지 않는다. 드라마 상의 허월은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과 사람의 진면목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도선대사처럼 사람의 미래를 보고 진정한 패자를 대비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명주성을 주기 전에 허월이 궁예의 욕망을 언급한 부분도 어디까지나 궁예의 숨겨진 결점을 언급하고 스토리상으로 훗날의 전개를 암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 시점에서 허월이 궁예는 그저 다음 세상을 예비하는 자일 뿐, 참미륵은 따로 있다고 여기는 장면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석총에게 한 변명이 그나마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전에 도선 같은 이로부터 계시를 받는 장면이 있거나 '설마 궁예가 이렇게 타락할 줄은 예상 못했다'[* 실제로 [[궁예(태조 왕건)|궁예]]는 아지태를 만나기 전과 독화살 맞고 사경을 헤매기 전까지는 미향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것 이외에는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양길을 죽이기 보다는 화친을 맺으려 하거나 가능하면 살려 주려고 하는 등, 어질고 현명한 성군이자 살아있는 부처나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설정할 경우 더 설득력을 높여준다.] 식이어야 했다. * [[형미]]: 강비와 왕자들이 궁예의 명으로 처형되자 그들의 상여를 만들어 행렬을 하는 등 짧지만 비중있게 등장한 인물인데, 문제는 첫 등장이 갑툭튀라는 것. 물론 나레이션으로 고승이라고 나오고 왕건도 '참으로 몰라뵈었사옵니다…' 하는 식으로 인정해주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봐야 갑자기 튀어나온 캐릭터라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했다.석총이나 허월도 마찬가지 아니었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 등장부터 비범하게 묘사된 허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석총도 궁예가 미륵인지 아닌지 의심했다가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는 등, 궁예에게 반감을 갖는 과정이 충분히 묘사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의 군대에서 군법사를 맡았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으니 실제 역사와 극의 흐름 모두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弓'''裔라는 이름 때문인지 극 초반부에 활을 잘 쏜다는 뜻으로 소개되었던 궁예가 정작 활을 쏘는 모습은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았거나 궁예가 기초적인 의학 지식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음에도 정작 자신이 병에 걸리자 병을 고치려 노력하기는 커녕 미륵이라며 독주로 병을 억누르는 짓거리를 한다든가,[* 작중 왕건이 궁예에게 독주를 계속 마시면 몸을 상하게 될 거라고 간언하는 장면이 있으며 술이 병을 악화시킨다는 언급이 가끔 등장한다. 여기서 작중 인물들은 독주가 몸을 망친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궁예의 관심법을 두려워하여 [[아지태(태조 왕건)|아지태]]의 역모를 고발했던 신방이 [[공산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다거나 초반부에 [[양길(태조 왕건)|양길]]과의 전투에서는 상당한 지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던 [[왕건(태조 왕건)|왕건]]이 황제가 된 이후 [[견훤(태조 왕건)|견훤]]과 본격적으로 대결할 때에는 그러한 면모가 증발하는 등[* [[조물성 전투]],[[공산 전투]] 직전에는 [[최응(태조 왕건)|최응]]이 친정할 것은 없다고 충분히 설득했는데도 철저히 무시했으며 [[삼년산성]] 전투 때는 한술 더 떠서 태자 왕무와 [[최지몽(태조 왕건)|최지몽]]이 나란히 옆에 붙어서 가지 말라고 설득하는데도 역시 아는 길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가 신검에게 당하고 말았다. 견훤의 선전포고와 서라벌을 급히 구원해야 했다거나 신숭겸의 전사 때문에 견훤에 대한 복수로 눈이 멀었다거나 하는 이유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양길(태조 왕건)|양길]]군과의 첫 전투 당시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어 끝날 것인지 점쟁이처럼 알아맞히며 [[은부(태조 왕건)|은부]]와 장수들을 감탄시켰던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 세세한 것까지 꼽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